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1807년 2월 27일 메인(Maine) 주의 포틀랜드(Portland1))에서 태어났다. 아버지(Stephen Longfellow)는 변호사였고, 어머니(Zilpah Wadsworth)의 아버지, 그러니까 롱펠 로의 외할아버지(Pleg Wadsworth, 1748∼1829)는 미국 독립전쟁 (American Revolutionary War, 1775∼83)에서 장군으로 복무하였고 훗날 국회의원까지 지낸 명사였다. 헨리 워즈워스라는 이름은 전투(Battle of Tripoli, 1801∼05) 중에 사망한 외삼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롱펠로는 8남매 중 둘째였다.
롱펠로는 여섯 살에 포틀랜드 아카데미(Portland Academy)에 입학했는데, 이때부터 라틴어를 공부해서 유창하게 구사할 만큼 명석한 아이였으며, 1820년 11월 17일에 첫 시 『러벨 호수 전투』("Battle of Lovell’s Pond")를 『포틀랜드가제트』(Poγtland Gazette)에 발표하였고, 1822년 가을, 열다섯 살의 나이에 보든 칼리지 (Bowdoin College, Brunswick, Maine)에 입학하였다. 그의 할아버 지가 보든 칼리지의 설립자였고(1794년에 설립), 그의 아버지가 이 학교의 이사였다. 롱펠로는 여기서 훗날 소설가로 이름을 떨 친 나사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64)을 만나 평생 지기로 지냈고, 그 자신도 여기에서 시인의 꿈을 키워가며 1824 년 1월부터 1825년 졸업할 때까지 여러 신문과 잡지에 40여 편에 달하는 시를 발표하였다. 학급에서 4등으로 졸업한 롱펠로는 파이베타카파(Phi Beta Kappa) 회원으로 뽑혀, 학위수여식에서 연설을 하는 영예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모교에서 현대어교수직까지 제안받은 행운아였다. 대학의 한 영향력 있는 이사가 롱펠 로의 호라티우스(Horace, 65∼8 B.C.) 번역문에 크게 감동해서 그리 된 것으로, 유럽에서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고 돌아온다는 전제조건이 달려있었다.
롱펠로는 1826년 5월부터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영국 등지를 여행하며 불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을 배우고 1829년 8월 중순에 귀국, 마침내 보든 대학의 교수로 임용된다. 봉급(600달러)이 턱없이 적다며 교수직을 고사 하는 롱펠로를 붙잡으려고, 보든 칼리지에서는 이사회까지 열어 봉급도 올려주고(800달러) 하루에 한 시간씩 도서관 사서를 맡는 조건으로 100달러를 추가로 지급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불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교재들을 번역 출판하였고, 여행기(0utre-Mer: A Pilgγimage Beyond the Sea, 1835)도 쓰며 그럭저럭 잘 지냈으나, 그리 만족스러운 삶은 아니었다. 시인으로 대성하고픈 사람이 학생들의 시험지나 채점하고 보고서나 수정해주고 있으려니 오죽 답답했으랴.
롱펠로는 두 번 결혼했는데, 1831년 9월 14일에 결혼한 메리 포터(Mary Storer Potter)는 포틀랜드에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다. 둘은 브런스위크(Brunswick)에서 살림을 꾸렸지만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그런 차에, 1834년 12월 어느 날 하버드 칼리지의 학장으로부터 그에게 현대어교수직에 일 년 남짓의 유럽연수기회까지 주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게 된다. 롱펠로는 그 제의를 즉시 받아들이고, 1835년에 바로 독일로 떠나,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일어,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스웨덴어, 핀란드어, 아이슬란드어 등을 공부하게 되는데, 여행 중에 아내를 잃는 큰 아픔을 겪게 된다. 1835년 10월, 임신 6개월의 아내가 유산을 하고 몸을 회복하지 못한 채 끝내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나이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롱펠로 는 눈물을 삼키고 아내의 시신을 즉시 염해서 납관에 안치하고 그것을 다시 참나무 관에 담아 배편으로 미국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1836년에 귀국하여 하버드칼리지의 현대어교수로 임용된다. 마치 갈증에 허덕거리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롱펠로는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차근차근 쌓아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1839년 첫 시집 『밤의 소리들』(The Voices of Night)과 산문 로맨스 『히페 리온』(Hyperion)에 이어, 1841년에는 두 번째 시집 『민요와 기타 시들』(Ballads and 0ther Poems)을 세상에 내놓는다. 새로 쓴 아홉 편과 십대에 쓴 일곱 편을 빼고는 주로 번역시(23편) 위주였음에도 『인생 찬가』("The Psalm of Life"), 『별빛』("The Light of the Stars") 같은 명품들이 수록된 첫 시집에 이어, 『헤스페로스 호의 난파』("The Wreck of the Hesperus"), 『마을 대장장이』("The Village Blacksmith") 같은 수작들이 수록된 두 번째 시집도 거의 즉각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다음해인 1842년에도 『노예제에 관한 시』(Poems on Slaνery)라는 작은 시집을 출간한다. 앞서 나온 두 시집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황량한 늪에 숨은 노예』( "The Slave in the Dismal Swamp"), 『한밤에 노래하는 노예』("The Slave Singing at Midnight")를 비롯하여 일곱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은 시집도 노예제폐지를 주장하는 롱펠로의 휴머니즘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집이었다.
롱펠로는 1843년 5월 10일에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가 7년을 구애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 프란시스 패니 애플턴(Frances Fanny Appleton)의 결혼승낙 편지였다. 하버드캠퍼스가 위치해 있는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보스턴 다리(Boston Bridge)를 건너 보스턴의 패니 집까지 거의 두 시간 거리를 밥 먹듯이 걸어 다니며 구애를 거듭했으나 아무 결실도 없이, 실연의 충격 때문에 신경성우울증에 걸려 하버드에 6개월 휴직을 신청하고 독일로 온천요양까지 떠났다는 롱펠로 그의 열망이 드디어 실현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 편지를 받고 가슴이 너무 떨린 나머지 마차를 마다하고 버릇처럼 다시 걸어서 패니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둘은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고 그 후 2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보스턴의 부유한 사업가였던 패니의 아버지(Nathan Appleton)는 롱펠로가 세 들어 살고 있던 크레이기 하우스(Craigie House, 훗날의 Longfellow House)를 구입해서 결혼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롱펠 로가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 1829)를 모방해서 지은 작품으로 통하는 산문로맨스 『히페리온』과, 그가 유일하게 남긴 연애시로 알려져 있는 소네트 『저녁별』("The Evening Star")의 주인공이 바로 패니 애플턴이었다.
그 이후로도 롱펠로는 1820년대 스페인 여행 경험을 3막의 극으로 표현한 『스페인 학생』(The Spanish Student: A Play in Three Arts, 1843), 시집 『이주하는 새 들』(Birds of Passage, 1845), 서사시 『에반 젤린』(Eνangeline: A Tale of Acadie, 1847), 시집 『바닷가와 화롯가』(The Seaside and the Fireside, 1850) 등을 꾸준하게 선보 인다. 그가 1840년에 작품으로 얻은 한 해 수익이 219달러였던 것이 1850년에 거의 다섯 배인 1,900달러에 달했다고 하니, 롱펠로의 대중적인 인기를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으리라. 그럼에도 아직 배가 고팠던지, 롱펠로는 1853년 6월 14일에 케임브리지 자택에서 작별만찬을 열고, 1854년 47세의 젊은 나이로 하버드교수직을 사임한다. 가르치는 일보다는 시창작에 몰두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다음 해에 출간해서 즉각적인 호평을 얻은 작품이 바로 그의 걸작 서사시 『하이 어워사의 노래』(The Song of Hiawatha)였다. 1859년에 하버드는 그에게 명예법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그러나 1861년 7월 10일, 롱펠로는 다시 한 번 아내를 잃는 큰 아픔을 겪게 된다. 바로 전날 무더운 한낮에 두 딸의 머리카락을 봉투에 집어넣고 밀랍으로 봉하다가 옷에 불똥이 튀어 심한 화상을 입은 아내를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낮잠을 자고 있던 롱펠로가 뒤늦게 알아채고 아내의 몸에 양탄자를 덮어 간신히 불을 끄긴 했으나 이미 그녀의 몸이 심하게 탄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롱펠로도 심한 화상을 입어 아내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얼굴면도를 하지 않고 수염을 기르게 된 것도 그때 얼굴에 입은 심한 화상 자국 때문이었다. 그토록 어렵게 얻은 아내를 그리 허망하게 보내버린 아픔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롱펠로가 몇 년에 걸쳐 전념한 일이 바로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의 『신곡』(La Diνina Commedia) 번역이었다. 그는 1864년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친구들을 초대해서 소위 단테클럽(Dante Club) 모임을 가졌는데, 소설가 윌리엄 하월즈(William Dean Howells, 1837∼1920), 시인 이자 비평가 제임스 러셀 로웰(James Russell Lowell, 1819∼91), 미술학자 찰스 노턴(Charles Eliot Norton, 1827∼1908) 등이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번역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1867년 봄에 단테의 『신곡』이 미국에서 최초로 완역되어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이 책들은 그 해에만 4쇄가 인쇄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1868년에는 롱펠로의 연수입이 48,000달러에 달했고, 1874년에는 한 편의 시("The Hanging of the Crane")로 3,000달러를 벌 정도였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기세였던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인기는 미국에서 끝나지 않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의 시들이 이탈리아어, 불어, 독어 등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는 영예 를 누렸다. 1877년, 그의 70회 생일에는 미국 전역이 마치 국경일 을 맞은 양, 각종 퍼레이드, 연설회, 시낭송회 등으로 들썩거렸다는 후문이다.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그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하였고,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이 친히 그를 영접했으며, 영국은 그가 죽은 후에 런던에 있는 웨스 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의 시인묘역에 그의 넋을 기리는 흉상까지 세워주었다. 그것은 미국의 시인에게 보내는 최초 최후 최고의 찬사였다.
그렇게 유명한 롱펠로의 육필을 받고 싶어 하는 팬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시인 존 휘티어(John Greenleaf Whittier, 1807∼92) 는 그런 끊임없는 요구 때문에 자기 친구가 죽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아마 그런 요구에 일일이 답장해준 벗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부러움의 표현이었으리라. 1879년 8월 22일, 극성스러운 한 여성 팬이 롱펠로의 집에 찾아와서, 자신이 누구랑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롱펠로에게 "이게 롱펠로가 태어난 집이에요?" 라고 묻더란다. 그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여인이 대뜸 "그럼 여기서 죽었나요?" 라고 물었고, 롱펠로는 "아직 아니다"라고 답했다는 재밌는 일화도 전한다. 휘티어의 말대로,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롱펠로에게 오히려 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롱펠로는 오랫동안 신경통으로 고생한 것을 빼고는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살다가 자연사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1882년 3월 어느 날 롱펠로는 심한 복통에 걸렸는데도 별다른 처치 없이 그냥 잠자리에 들었고, 그 후로도 아편진통제에 의지 해 여러 날을 근근이 버텼다고 한다. 그리고 1882년 3월 24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먼저 떠난 두 아내가 묻혀있던 케임브리지의 마운트오번 묘지(Mount Auburn Cemetery, Cambridge)에 안장되었다. 흔히 너무 감상적이고 교훈적인 시인으로 불리고, 학자들 간에는 영국 낭만주의 시의 아류 혹은 표절시인으로까지 혹평받으며 외면당하기 일쑤지만, 롱펠로의 시들이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누리고 있는 대중적인 인기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만의 위대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생찬가
젊은이의 가슴이
시편의 작자에게 한 말
애처로운 음률로 말하지 마라,
인생은 한낱 공허한 꿈이라고!
자는 영혼은 죽은 영혼,
사물들의 겉모습이 다는 아니니.
인생은 진실한 것! 인생은 진지한 것!
무덤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도,
영혼에 대한 말은 아니었다.
기쁨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우리의 숙명적인 결말 혹은 길은.
사람답게 살다, 내일이 올 때마다
오늘보다 멀어지나 싶으면 그뿐.
예술은 길고 시간은 덧없이 지나가,
우리 가슴, 굳세고 용감해도,
천으로 싼 북처럼 나직이, 장송곡 울리며
무덤을 향해 나아가고 있나니.
세상이라는 드넓은 전쟁터에서,
인생이라는 야영지에서,
잠자코, 쫓겨가는 소떼가 아니라!
투쟁에 임하는 영웅이 되어라!
미래를 믿지 말라, 아무리 즐거워도!
죽은 과거의 시체는 묻어버려라!
행하라—살아있는 현재를 살아라!
가슴은 품고, 신은 머리에 이고!
위인들의 삶이 일깨우는 것은
우리도 숭고한 삶을 누리다가,
시간의 모래밭에 우리 발자국
남겨두고 떠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누군가, 인생이라는
장엄한 대양을 항해하다
난파되어 쓸쓸히 버려진 어떤 형제가
보고, 다시 용기 낼 발자국들을.
자, 그럼, 벌떡 일어나서 살자,
어떤 운명도 맞설 마음으로.
끊임없이 이루고, 끊임없이 수행하면서,
노력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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